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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a


오늘은 MBC '나는 가수다' 자문위원장'이자 서울예대 교수님이신 장기호 님의 음악인생 이야기를 올립니다. 남편이 먼저 페이스북 통해서 네이버뮤직에 실린 이 분의 글을 읽고 너무 좋다고 하길래 저도 읽어 봤는데 정말 공감되는 이야기가 너무 많고 재밌더라구요.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 사실 장기호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랑 비슷한 이유(음악성+대중성+상업성에서 '음악성'이 빠져 있음..)로 저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 듣지도 않는데, 이렇게 한국 대중음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주셔서 참 대단하시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끝없이 도전하시는 모습도 너무 멋지시구요. 이 글이 너무 좋아서 장기호님께 페이스북 친구신청도 하고(다행히 제가 4995번째 친구더라구요. 조금만 늦었으면 친구 못될 뻔 했네요ㅋ) 허락받고 올립니다^^

그런데 음악은 퍼올 수가 없어서 안타깝네요. 사실 저도 네이버 음악이 국내에서만 재생가능하다고 해서 들을 수 없어서 다는 아니지만 일일이 직접 유투브 등에서 검색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음악도 참 좋더라구요~ 저랑 약간 음악적 코드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거 같아요ㅋ (몇 곡은 유투브 링크 걸었습니다^^)

 

아무튼 음악하시는 분들은 모두 꼭 읽어야 할 이야기인 거 같습니다.

(원래의 글은 다음 링크를 클릭하세요. 네이버 뮤직 스페셜 : 장기호가 직접 전하는 굴곡진 음악 인생, 그리고 지금의 진행형)




Intro1986~2012, My 'Music Story & History'




당시의 F.M. 음악방송에서는 주로 서양의 POP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고 1970~80년대 후반까지 세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POP 음악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아직도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나 비틀즈(Beatles),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같은 뮤지션을 뛰어넘는 창의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대중성을 겸비한 대중음악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천재성과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인류가 만든 최고의 POP 음악들을 들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머지않아 음악을 하게 될 나에겐 커다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종류의 음악을 어떻게 만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나를 사로잡았고 특별히 나의 귀를 사로잡는 음악들을 나의 음악목록에 하나, 둘씩 저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김종진과 나, 연습 해군 시절


서양 대중음악의 본질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느끼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수백 년간의 음악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사실상 바흐(Bach) 이전의 음악형태부터 따져 본다면 족히 500년 이상은 되었을 그들의 문화유산의 일부인 것이다. 반면에 그들의 음악 역사와 전혀 무관한 (고작 6.25를 전, 후로 서양 대중음악을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그들의 음악과 같은 수준의 것을 만들겠다는 것은, 마치 "A.B.C.D.도 제대로 모르면서 영작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했다.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그들의 감각과 음악성만으로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수 십 년간 피땀으로 훈련받아온 전통있는 음악교육이 그들의 음악성과 결합되어 그 빛을 발한 것 이리라… 그런 음악들을 듣고, 배우고, 듣고, 배우고, 듣고, 배우고… 그런 역사를 가진 나라.


내가 대중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그 당시, 우리나라의 대중음악계는 '서양의 POP과 비슷하거나 흉내를 낸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느낌의 곡을 만들기만 하면, 나름 '대가'로 인정받을 정도로 서양 POP의 수준은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정작 POP의 종주국인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철저한 창의력이 기반이 되어야 하고 오락적이고 대중적이기 이전에 먼저 '음악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음악적이지 못하고 오락적이고 상업적이기 만한 음악을, 그들은 'Junk Music'이라고 부른다. 사포닌 성분이 없는 인삼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사실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나로서는 음악공부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작은 음악들도 본질적인 부분을 경시하지 않는다. 서양의 대중음악 작곡법을 공부하기 위해 POP의 본고장인 영국 또는 미국으로 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급기야 마음먹게 된다. 그리고 어차피 평생 음악을 할거라면 지금부터라도 음악으로 일하고 돈을 버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하여 1986년 과감히 우리나라의 대중음악 시장에 뛰어들게 되고 그 공식적 첫 출발은 김현식과의 만남이다.


조성모 음반 녹음 중에


1986대중음악으로의 첫 발걸음,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작고한 음악선배 김현식과 나는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었고 자주 만나서 음악 얘기를 하곤 했다. 거리에서 만난 어느날 김현식은 나에게 새로운 밴드 조직을 부탁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다. 그리 길지 않은 활동이었지만 김현식 3집 [비처럼 음악처럼]을 만들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그대와 단둘이서'라는 가요를 작곡했고 대부분 곡의 편곡과 Bass 연주에 참여했다. 김현식은 악보를 보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이 만든 곡을 녹음으로 들려주어 우리 집과 김현식의 집을 오가며 상당수의 악보를 내가 만들어 주었다.


김현식과 나, 공연 중에


대중음악계의 첫 출발치고는 거물급 가수였던 탓에 음악적으로 나름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 되었다. 지금도 '비처럼 음악처럼'이 있는 김현식의 앨범을 들어보면 부족했던 나의 음악적 지식과, 경험. 반면에 순수하고 깨끗한 분위기를 느낀다. 특히 당시의 김현식과 함께했던 음악 동료들인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박성식, 김광민, 정원영, 한상원, 이훈석, 문관철 등이 생각난다.


동아기획 최전성 시절


그러나 팀을 만든 지 2년 만에 김현식의 건강 악화로 활동이 중단되면서 유학 비용을 벌겠다던 목적이 무산되고 실제로 소득도 거의 없었던 그 시절, 제대로 음악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현 드라마 제작자인 송병준을 만나게 되면서 밴드 음악이 아닌 방송 음악과 광고음악에 눈을 뜨게 되고 [MBC 베스트극장]의 '샴푸의 요정' 주제가를 만들게 되면서 대중음악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다.


1988더 넓은 세계로, 전설적인 최장수 그룹 '사랑과 평화'


광고음악 녹음실에서 송병준과 함께


그러나 서양 대중음악의 핵심인 밴드의 유혹은 당시의 나로서는 뿌리치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전설적인 밴드 '사랑과평화'의 이남이 선배가 솔로로 전향하면서 기타리스트 최이철 선배가 나를 찾아오셔서 함께 밴드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고, 당시 Bass연주와 작, 편곡 공부에 심취했던 나는 스튜디오 안에서 편하게 녹음하는 것보다 무대 위에서 발산하는 연주에 더 매력을 느꼈던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의 연주가 나름대로 음악적 열기를 발산할 수는 있었지만, 그 당시 내가 연주하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많은 음들이 무대 바닥으로 내 버려지는 듯한 느낌에 대해 항상 불만족해 했고 도대체 내가 왜 지금 이 음들을 연주하는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들었고 마침내 '사랑과평화'와 일본 공연을 통해 그 답을 얻게 되었다.


1990~1994한국 퓨젼재즈의 시작을 알리다 '빛과 소금'


[MBC 베스트 극장] '샴푸의 요정' 촬영 중인 채시라, 송병준, 박성식. / 공연 사진에서는 두 번째가 나.


1988년 일본의 대도시 네 곳에서 환태평양 음악축제가 열리는데 우리나라 대표로 '사랑과 평화'가 선발되었다. 일본에서 머무는 약 한 달간 세계적인 음악가와 프로듀서 그리고 음악 평론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내린 결론은 'POP의 본고장에서의 음악공부'였다. 


일본공연을 마치고 본격적인 유학을 계획하게 되었는데 유학 가기 전, 부족하더라도, 나만의 음악 세계를 펼치고 싶었다. 평소 눈여겨보았던 후배 한경훈, 그리고 초등학교 동창생 박성식과 '빛과 소금'이라는 프로젝트성 그룹을 만들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음악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1990~1994년 동안 네 장의 빛과 소금 정규 앨범과 두 장의 프로젝트성 음반을 발표하고 1995년 평생의 염원이던 미국 보스턴의 버클리음악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1995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 버클리 음악대학 유학


1999년, 버클리 음악대학 졸업식 직후 / 유학시절 김광민과 나.


나의 유학 최고의 목표는 학점이나 학위 또는 그 이상의 사치스러운 어떤 것이 아니었다. '서양의 음악 교육방식'이 가장 큰 관심사였고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느끼고 이해했던 POP 음악에 대한 인식과 실제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인가?'였다. 내 생각과 추측에 '동일한 내용'과 '상이한 내용'이 존재했다. 내 생각과 맞아떨어진 것은, 내가 존경하거나 관심의 대상이던 서양의 음악 대가들은 음악을 만들기 전까지 엄청난 음악 이론과 지식을 어떠한 형식으로든 공부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간혹 악보도 보지 못하고 감각만으로 음악을 하는 천재적인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내 생각과 반대였던 것은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우리 대중음악의 경우, 먼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음악들을 머리에 떠올리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초기 아이디어부터 이미 누군가의 아이디어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대중음악 세계에서 창의성이 없는 음악은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해도 그것이 자신만의 음악 언어로 풀지 못한 음악 이라면 평론가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5년이라는 유학기간은 나에게 적지 않은 음악적 Culture Shock을 주었을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들어오던 서양 대중음악의 작곡 비법을 나름대로 원 없이 해결하고 새로운 음악숙제를 안고 귀국하게 되었다. 이제는 내 차례다! 내가 과연 무엇을 얼마나 공부하고 습득하고 실제로는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술이란 것은 머리로 이해한 것을 몸으로 풀어내지 못하면 실제로는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1999년 가을 귀국후, 나는 또 다른 Culture Shock를 느꼈다. 이제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은 예전의 체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들의 연령층은 더 어려지고 나는 퇴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보다 먼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광민, 한상원, 정원영 선배는 이미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는 듯 보였다. 서양 대중음악의 조건 = 음악성+대중성+상업성에서 '음악성'이 거의 빠져 버린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트렌드가 지금까지 계속 되는 듯하다. 이제 우리 대중음악은 감상할 수 있는 내용이라기보다, 놀고 즐기기만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음악적으로 훌륭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음악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2002새로운 음악적 시도, [1집 KEEHOsRadio]


1999년, 5년 간의 유학을 마치고 빈손으로 돌아온 나는 기댈 곳이 없었다. 거의 모든 재산을 학비로 써버리니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급기야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걸려 살맛 나지 않는 현실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 머릿속은 온통 새로 만들어야 할 음악들로 가득 찼다.


2001년, 나는 나의 자전적 내용을 토대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유학기간 중 공부한 음악적 지식과 경험 외에 제작비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나의 새로운 음악을 위해 아무도 투자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혼자 모든 것을 만들고 연주해야 하는, 'One Man Band' 형식으로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2001년 여름부터 버클리 후배 엔지니어 하정수가 녹음을, 모든 악기를 내가 연주하며 노래하며 결국 [KEEHOsRadio]를 완성 시켰다. 


일산에 있는 후배의 작은 작업실에서 모든 녹음은 진행되었다. 턱없이 부족한 기계와 악기였지만 그동안 유학시절 공부했던 모든 것들을 곡 하나하나에 담아내어 지금까지 내가 만든 음반 중 가장 적은 제작비와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기억과 함께 음악적으로는 가장 만족스러운 앨범이다. 그러나 프로모션이 거의 없어 방송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묻혀버린 앨범이 되었다. [KEEHOsRadio]는 나에게 많은 실전 경험을 갖게 했다. 특히 'Hard Disk Recording'에 대한 메카니즘을 이해하게 되었고 '나의 연주실력과 연주 가능 악기가 무엇인지?' 등 나를 시험해보는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2004다시 일어서다, 장기호 밴드


2000년 즈음, 목동에 문화콘텐츠 녹음실이 생겼고 후배 엔지니어 이재훈이 실장으로 있을 무렵 녹음실에 자주 들렀는데 당시 활동하던 여러 뮤지션들과 후배들을 만나게 되고 특히 해군 후배인 기타리스트 이정철을 만나 새로운 음반을 구상하게 되고 버클리 음대 후배인 드러머 박근혁과 당시 동덕 대학원 재학중이던 피아니스트 이선지와 함께, 처음으로 나의 이름을 내건 '장기호 밴드'를 녹음하게 된다. 


장기호 밴드는 4명의 리듬 섹션이 이상적으로 어울릴 때 충분히 완성된 사운드를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한 편곡 적 아이디어의 실험적 앨범이다. 주로 일본의 퓨전 재즈 밴드들이 하는 작업으로 철저히 계산된 편곡기법과 연주력을 기본으로 하는 음악적 장르이다. 일본의 Casiopea(카시오페아), T-Square(티-스퀘어), Dimension(디멘션) 등이 이런 류의 음악을 연주한다.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에서 그런 음악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대중음악 속에 연주와 노래 그리고 퓨젼재즈적 기법을 적용한다는 것이 장기호 밴드 앨범의 핵심이었고 대표곡 'When I Think Of You'를 발표했다. 역시 열악한 여건으로 충분한 리허설을 갖지 못하고 완성한 앨범이다.


장기호 밴드


이 앨범 또한 막강한 홍보력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가수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홍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밴드의 장점은 함께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히 밴드 유지에 걸림돌이 되었다.


2005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 교수임용


서울예술대학에서 강의 중인 나.


2005년 나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서울예술대학의 전임교원 공채에 임용된 것이다. 내가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후학을 가르치는 일도 나에게는 소중한 일이라 생각해왔고 그 일이 실현된 것이다. 그 어느 때 보다도 나의 대중음악가로서의 책임은 더욱 중요하다고 느꼈다. 이제는 나름 우리나라의 실용음악을 대표하는 대학의 교수로서, 그리고 그동안 묵묵히 나의 음악을 해온 한국의 대중음악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욱 깊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2007나만의 음악을 그리다, [Chagall Out Of Town]


2006년 그동안의 실패를 거름삼아 또 다시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음악적 아이디어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이 시기, 나의 목표는 개인적으로나마 우리의 대중음악이 음악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는 인정받기 힘든 음악방향이라고 판단하여 차라리 나만의 음악적 비전이라도 높게, 그리고 넓게 펼치자는생각이 들었다. 음악에 관심을 갖기 전, 나는 원래 그림그리기를 좋아했고 미대를 잠시 다닌적도 있다. 어릴 때 할머니 댁에가면 고모가 구입한 세계적 화가에 대한 책을 보곤 했다. 글이 별로없고 그림이 많아서 나는 거의 모든 책을 다 보았다. 그 때 그 그림들의 그 색채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특히 '마르크 샤갈'의 그림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그 독특한 색채감에 반해 그 느낌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고 고등학교 미술부 시절에는 그런 색채감을 즐겨 사용했다. 어느날 나는 그런 색채감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 내가 즐겨 사용했던 화성적 기법이 일맥한 듯 했다. 결국 2007년, [Chagall Out Of Town] 이라는 타이틀로 새로운 앨범을 완성했다.


운이 따랐는지 이 앨범은 처음엔 투자자를 만나게 되어 비교적 여유있게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을 만들고 녹음할 때 나의 불만은, 늘 내 생각대로 표현 해주는 세션맨을 찾기 힘들거나 경제적 여유가 부족해서 그들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느정도 여유가 있음에도 맘에 드는 연주자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좋은 연주자는 많이있다. 그러나 나의 음악적 표현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음악적 해석이 가능한 연주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가능성 있는 제자들, 또는 나의 생각을 귀담아 듣고 연주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기능적으로 훌륭한 세션맨은 많은데 음악적으로 훌륭하고 나의음악을 넉넉히 상의하고 함께 해 줄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었다. 


미국인 드러머, 작곡가겸 교육자인 Forest Muhter는 내가 음악적으로 상의하는 좋은 후배이다. 포레스트는 나의 음악적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연주를 해 준 뮤지션이었다. 버클리 출신 피아니스트 송준서는 Bebopper이지만 오래전 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연주해 온 후배라 이번 앨범에 적격이라 생각했고 훌륭하게 나의 음악그림을 잘 그려 주었다. 서울예대 제자 기타리스트 김실장도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준 학구적 연주인이다. 그리고 엔지니어 이재훈과 황병준이 사운드 마무리를 해주어 [Chagall Out Of Town]이 완성되었다. 


그동안 나의 무명 앨범들(?)이 밑거름이 되었는지 샤갈 앨범의 발라드 곡 인 '왜 날'이 매일유업의 '카페라떼' 광고에 삽입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이 앨범을 모니터 했던 일본의 한 음악 프로듀서가 장기호와 음악적 성향이 비슷한 미국의 재즈 싱어 마이클 프랭스와의 듀엣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기획사와 후속 앨범을 논의 하던 중 의견의 차이가 심해 결국 [Chagall Out Of Town]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2009편견을 깨고 만든음악, [The Land Of Morning Calm]


[Chagall Out Of Town]의 후속으로 나는 오랜 염원이었던 브라질리안 사운드를 구상했다. 브라질리안 사운드야 말로 '현대적 화성체계'를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제대로 느낌을 줄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브라질의 대표적 뮤지션인 Ivan Lins(이반 린스)나 Antonio Carlos Jobim(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등의 음악적 기법은 감성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다. 특히 현대음악의 로맨티시즘에 기반한 음악 이론을 공부하지 않으면 낭만적이고 아름답고 지적인 표현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Antonio는 낭만기 음악에 대한 공부를 심도 있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Ivan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음악을 공부한 경력이 있다. 의외로, 우리가 느끼는 감성적인 음악들 대부분이 이성적 논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유학을 통해 깨달았다. 우리나라 유일의 보사노바 가수 효기의 음반을 제작한 후배인 가요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유정연은 이미 브라질 음악에 깊이 심취해 있었고 그와 음악적 교류를 갖던 중, 함께 브라질리안 뮤지션들과 녹음할 계획을 세웠으나 계획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교수인 나는 방학을 이용해야 했고 당시 여름방학 기간에 브라질에 뎅기열이라는 전염병이 돌아, 가능하면 여름 지나고 가을 즈음 브라질에 오라는 것이다. 여름이 지나면 2학기가 시작되므로 결국 유정연과의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서울예대 동료 중 예전의 긱스에서 편곡과 건반을 담당했던 강호정 교수가 있다. 강호정의 음악 취향은 나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고, 전자음악 분야에는 달인으로 인정받는다. 나와는 음악적으로 다른 성향일 수 있는 강호정과 작업을 하면 어떤 음악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브라질에서 녹음하려 했던 음악들을 들려주며 관심이 있는지 이야기하던 중, 의기투합해서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 보기로 합의하고 우리 둘은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는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므로 학기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그의 작업실에서 음악을 만들었다. 강호정과의 작업은 그동안 나의 음악적 매너리즘을 깨는 과정이었다.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결합으로 나온 사운드는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다. 다 지워버리고 브라질로 가서 녹음하고 싶었다. 


클럽에서 공연중인 Kio & Hodge.



그러나 나도 내 생각만 옳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음악적 편견을 깨야 한다면 깨야 할 것이다. 강호정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리듬에 관한 이견을 줄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결과가 나올 때까지 강호정의 수재적인 감각을 존중하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의 영문이름을 프로젝트명으로 정하기로 하고 'Kio & Hodge Project'라는 이름으로 싱글을 발표했다.


결과는, 나로서는 대만족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 없었던 새로운 지적인 사운드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 후로 강호정과 나는 제자 연주인들과 함께 2010년도에 적지 않은 공연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트렌드(?)와 맞지 않았고 프로모션의 힘이 부족한 관계로 실험적 사운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과 함께하지 못하는 나의 음악에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또 한 번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2012년 오늘음악의 기본을 지키며 만든 음악 그림, [Chagall Out Of Town 2]


프로덕션 소속없이 음악활동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의 음악 행보를 멈출 수는 없었다. 이제 나의 경제력은 바닥에 떨어졌고 교수 월급만으로 음반까지 제작 한다는것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년, 나는 다시 새 음반 작업에 착수한다. 그 시점에서 '이제 내가 어떤 음악을 해야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금 더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최대의 약점인,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다소 어려운 음악이라는 평가'가 늘 마음에 걸렸었다. 지금까지 만든 음악들 중 [Chagall Out Of Town]이 비교적 대중적 취향이라고 판단하고 그 후속작을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 작품의 음악적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복잡하지 않은 멜로디에 화려한 화성과 리듬'이라 할 수 있다. 다분히 낭만주의적 표현이고, 지적이고, 행복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R.I.C.H 사운드. 즉, Romantic, Intelligent, Charismatic and Happy 를 실현시키는것이다. '낭만적 가사'를 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음악 자체를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낭만적인'의 의미는 음악에서는 더욱 깊고 다양하다. 서양의 음악가들은 이미 그 정체를 이론으로 정리해놓았다. (Ron Miller교수의 Modal composition & Harmony를 보면 잘 설명돼 있다.) 음악적 심리를 이용해 사람의 심리를 조정하는 것이 그 핵심인데 즐거운 노랫말이 있는것 처럼 음악자체의 작법도 그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 유학 후반기에 이런 작곡기법에 심취해 있었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분야가 할리우드 영화음악이다. 그들은 작곡가의 기분대로 작곡하는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리를 조정하는 음계를 이용해서 작곡하는 것이다.


이번 [Chagall Out Of Town 2]도 같은 맥락의 음악들이다. 무엇보다도 낭만적 효과를 가진 화성과 멜로디 프레이징, 그만큼 나만의 음악적 의도가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나의 음악적 의도에 이미 익숙해있는 재즈피아니스트 이선지, 기타리스트 김실장, 베이시스트 양영호, 드러머 이원희, Kio & Hodge에서 게스트 보컬을 맡았던 이정표, 그리고 엔지니어 이재훈, 황병준, 윤영준, 이효섭, Art Work 에는 오랫동안 나의 음악을 아껴준 권성환이 함께해 주었다. 특히 이번 앨범 녹음중 엔지니어 이재훈은 대장암 판정을 받고 죽음과 사투를 벌이느라 고생이 많았다. 중간에 다른 엔지니어로 바꾸기보다는 이재훈이 마무리 하는것을 원했다. 그런 이유로 제작기간이 길어졌다.


[Chagall Out Of Town 2]는 2011년 10월즘 시작하여 2012년 9월 말에 드디어 탄생했다. 처음에는 1곡의 디지털 싱글을 계획했다. 그 첫 곡은 '너만의 향기'였는데 리듬 섹션의 조합이 지금까지의 어떤 상황보다도 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래서 한 곡 더 녹음하기로 하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어'를 녹음하게 되었는데 멤버들 모두 욕심이 생겨서 3곡이 더 추가되는 상황으로 가게 되어 영어버젼의 곡까지 6곡의 미니앨범을 완성하게되었다. 이번 미니앨범이 갖는 의미는 나에게는 사뭇 크다. 그동안 '빛과 소금' 이후 여러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나 대중들에게 노출되기도 전에 사장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제 다시 재기의 의지를 보이고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지난 10여년간의 음악행보를 정리해 보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6곡의 신곡과 지난 여러장의 앨범중에서 대표적인 작품들을 함께 넣은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거의 알려지지않은 보너스 트랙의 6곡은 신곡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미니앨범이 우리나라 대중음악과 실용음악 분야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우리나라의 대중음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란다. 이번 앨범이 또 다시 실패한다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장기호의 음악 족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나의 작은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남게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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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ugene & Ju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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