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Eugene
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생 형님 누나들 따라다니면서 찬양팀 활동을 했었습니다. 찬양팀 이름은 마라나타 선교단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마라나타에서 활동했던 이 시기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시절 저는 참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저도 나름 불우한 환경이었는데 교회와 마라나타가 있었기에 저의 청소년기는 아주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이 찬양팀을 빼고서는 저에 대해 논할 수 없습니다.^^
마라나타는 저의 모교회 출신의 형님들께서 모여서 만든 팀이었습니다, 그 당시 주요 멤버로는 단장이자 키보드를 맡았던 큰성욱이 형, 일렉기타에는 작은 성욱이 형, 베이스에 상용이 형이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에 두 명의 김성윽이 있었기 때문에 나이가 더 많은 형이 큰 성욱이형이구요, 더 어린 형이 작은 성욱이 형이라고 저희들은 그렇게 구분했습니다.
교회에서 형들이 연습하고 있는걸 넋을 잃고 보곤했습니다. 신디사이져에 일렉기타와 베이스기타는 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통기타를 배움과 거의 동시에 저는 베이스도 시작했습니다. 베이스 기타라는 악기는 어렸던 저에게는 참 우습게만 느껴졌습니다. 베이스 기타는 일반기타에 얇은 줄 두 개 없는거더라구요.
베이스는 취미로 했습니다. 물론 실제 베이스 기타로 연습한건 아니고 그냥 통기타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 항상 얇은 줄은 잘 끊어졌습니다. 그러면 한 참이나 줄이 끊긴채로 방치되곤 했었습니다. (돈이 아까워서 줄을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줄이없는 김에 통기타로 베이스 기타를 연습했었습니다.
제가 기타를 배운 뒤의 어느날, 교회에서 형들이 연습하는 걸 보고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할 수 있겠다." 형들에게 기타 한 번만 치게 해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안된다고 하더군요. 하기야 증학교 1학년짜리 애한테 악기를 맡길리가 앖었겠지요. 그래도 한 번 치게 해줄까 싶어서 끝까지 연습하는거 구경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참을 기다리다가 형들이 잠시 밖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저희 아이들은 기회를 포착해서 한 번씩 기타를 쳐봤습니다. 정말로 할 만하더군요. 그 때 단장이었던 큰 성욱이형이 그 때 저의 연주를 좋게 본 것 같았습니다.
상용이 형이 군대를 간 뒤 자연스럽게 제가 마라나타에서 베이스를 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바로 이 때!!) 저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마라나타를 초빙 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수 많은 교회들을 다니면서 집회를 하게되었는데 이런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제법 많은 곳으로 집회를 다녔습니다. 저는 그당시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큰 성욱이형은 집회가 마칠 때 쯤 되면 집회 도중에 저를 청중들에게 (이 아저씨가 사실은 중학생이라고) 소개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지금의 키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저를 중딩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늙어도 너무 늙었었죠. ㅋㅋ
그리고 찬양팀의 다른 한가지 기쁨이 있었다면... 예쁘고, 착하고, 믿음좋고, 천사같은 누나들이랑 함께 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형님들도 좋았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 거 자체가 저한테는 가슴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저한테는 그런 대학생 형들과 누나들이 참 동경이 되더군요. 게다가 저는 시골인이었기 때문에 그 형님들과 누나들이 저한테는 세련된 도시인들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겨울이 되면 학생 동기수련회들이 많았습니다. 한 겨울에 보통 세 군데에서 네 군데의 수련회에서 섭외를 받았습니다. 세, 네차례 수련회 하고나면 겨울방학은 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부를 잘 못했습니다. ^^수련회는 이무래도 큰 집회였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썼던거 같습니다. 고신대에서 지휘를 전공했던 큰성욱이형이 고신대의 특출한 뮤지션들과 싱어들, 그리고 율동팀을 조직해서 데려오셨습니다. 성악 전공이었는데도 피아노를 엄청 잘 쳤던 성지누나의 연주는 어렸던 저한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 누나 말고도 연주와 노래를 잘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윤환이 형의 그 맑은 테너 목소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때 저희팀은 노래와 연주가 아니라 율동으로 최고였을 때도 있었습니다. 한동안은 마라나타는 율동팀이 다 살린다는 말을 꽤 오랜시간동안 들었습니다.어쨌든 저는 음악을 전공했던 형들, 누나들과 함께 하면서 많은 음악적 자극을 받았었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큰 복이었습니다.
사실 마라나타 초창기 때에는 큰성욱이 형이 음악을 지도했었습니다. 그 형은 음악적 요구들을 아주 깐깐하게 했었습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디테일하게 요구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게 참 신선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연주자가 신경을 쓰면 쓸수록 연주는 더욱 더 완벽하게 된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고, 또 적절하게 긴장하면서 연주를 해야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큰 성욱이형의 기준에 부합되는 연주를 하기 위해 항상 긴장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성욱이형의 그 까다로움이 저를 음악적으로 많이 성장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마라나타는 독립된 찬양팀이었지만 고신대 내에서 동아리로도 있었기 때문에 저의 대학생활은 마라나타와 동거동락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기존의 마라나타 멤버들이 전부 교체된 상태였습니다. 큰성욱이형만 여전히 대장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한 때 정오찬양단 자취방에서 빈대 친 시기가 있었는데, 저희가 성욱이 형이라고 부른다고 정오찬양의 대장이었단 병수형이 저희들을 야단치시더군요. 그 이후로 저와 (같은 교회 출신이었던)드러머였던 인섭이 형이 성욱이 형을 더이상 형으로 부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홍길동과 같이 더 이상 호형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성욱이 형을 단장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단장님과는 열 살 차이였지만 저희 동네는 시골이라 그랬는지 다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니 단장님께서 저를 음악감독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제가 어느새 단장님의 음악성을 뛰어 넘었던 것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의 마라나타 연주 라인업은 이랬습니다. 키보드에는 석이형(류석)이었는데 석이형 군대 있을 동안에는 성이 누나(류성)가 했었습니다.두 분이 서로 외자로 이름이 비슷합니다. 세컨건반에는 현아누나(김현아)였고 막판에는 지영이가(임지영) 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지영이가 브라스로 4도화성으로 연주하는거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지영이는 옛날부터 뭔가 의외의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던 애였습니다. 결국 걔와 결혼까지 했네요^^ 드럼에는 인섭이형(이인섭), 일렉기타는 저랑 나이가 똑깉은 경태(이경태) 였습니다.
팀의 음악적인 발전을 위해 많이 애썼습니다. 어느새 사람들이 저희를 보고 음악적으로 잘하는 팀이라고 하더군요. 지나고 보니 어느정도는 목표를 달성한 거 같습니다. 근데 마라나타에서 연습을 따로했던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어거지로 억지로 갔던거 같습니다. 그냥 집회자체가 연습이었던거 같습니다.^^
그리고 마라나타는 독특하게도 엄청난 엔지니어 군단이 형성되었습니다. 마라나타에서 배출된 엔지니어가 한두명이 아닙니다. 마라나타에는 전문 엔지니어 군단이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몇가지 사역들이 있습니다.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 전도여행과 세 번의 필리핀 단기 선교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일 많이 생각나는 것은 김광민 할아버지입니다. 노숙자 할아버지였던 김광민 할아버지와 같이 지냈던 시간은 저에게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한 번은 구걸해서 얻은 햄버거를 저한테 주시면서 이러셨습니다. "유진이 배고프지? 이거 먹어..." 정말 배가 고팠던 저는 그걸 먹으면서 눈물이 핑 돌더군요. 제가 할아버지를 돌본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저를 돌보신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라나타 멤버들과 목욕탕에서 다같이 할아버지 목욕 시켜드렸던 일들... 면봉으로 귀를 팠을 때 피고름이 쑥 나와서 깜짝 놀랐던 것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고 세상을 떠나셨는지 궁금합니다. 마지막에는 저희가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하고 그냥 헤어졌기 때문에 그 할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는지 모릅니다. 사실 저는 김광민 할아버지에게 아직도 죄책감이 많습니다.
소년원에서 찬양집회했던 그 시간들도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하는 집회는 좀 부담스럽더군요.^^ 그리고 역시 새들원(고아원)사역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꽤 오랜시간동안 새들원과 관계를 가지면서 아이들의 믿음을 세워주는 사역을 했었습니다. 한 번은 몇몇 아이들이 원을 탈출해서 저희가 있던 자취방으로 같이 살자고 왔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에 굶주려 있던 그 아이들을 보면서 참 맘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진게 너무 많은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마라나타에서 함께했던 석이 형과 주일이 누나를 이 곳 달라스에서 만났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석이 형은 이제 목사님이 되셨고, 주일이 누나는 사모님이 되셨습니다. 저의 가장 좋은 때를 마라나타에서 보냈고 의미있는 사역도 많이 했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마라나타라는 좋은 사역팀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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