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한때 ‘평양사람’이었습니다. 청진시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면서 ‘청진사람’이 되었지만 돌아가시던 그날까지 마음은 늘 평양에 두고 사시는 듯 했습니다.
슬하에 둔 나와 내 동생 명숙에게 노래처럼 하시던 이야기도 “너희들이 평양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던 것이었고 우리 자매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도 ‘평양’이야기를 놓은 적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평양을 떠올리던 어머니에게 어느 날 “엄마, 평양이 왜 그렇게 좋아?”하고 저와 제 동생이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셨던 어머니는 두 딸의 눈을 그윽이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평양)에선 그래도 사람답게...살 수 있지 않냐.”
그때부터 신문과 TV등을 통해 막연하게만 바라보던 그곳 평양이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나도 사람답게 살기위해선 어떻게 하나 평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송화술을 익혔고 청진시당 선전부 소속 방송원이 되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중앙방송국 방송원이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가 그토록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이야기 하시던 평양으로의 길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이제 남편을 만나 약혼을 하고 결혼날짜까지 받아두었던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 두 딸을 다시 불러 앉혔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못나서 너희들을 이 지방도시에 묶어두고 촌놈소리를 듣게 하였구나. 하지만 이제 어쩌겠니, 이제 춘실이도 시집을 가야하니 평양 갈 생각은 접어두고 남편이나 잘 섬기고 살아야지...”
그날 제가 어머님께 드렸던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엄마, 가만히 생각해 보니 평양에 가야만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여기서도 당에 충성하고 직장생활을 잘 하다보면 남보다 더 보람 있게 살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시던 어머니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머니의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를 조금씩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나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다.
어느덧 나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엄마가 되던 해, 나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가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였음으로 배급소는 문을 닫아 버린 지 오래고, 병원을 찾아가도 약 한 톨 구할 수 없었던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한평생 우리 두 딸만을 위해 고지식하게 살아오신 어머니, 떠나온 고향 평양을 마음속에 품고 죽어도 그곳에 묻히기만을 꿈꿔온 우리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는커녕 병석에 누운 어머니에게 따끈한 밥 그릇 대접할 수 없었던 저였습니다.
“평양은 그래도 식량배급을 준다는데...” 그렇게 운명하는 순간까지 평양을 잊지 못하던 어머니에게 동네 과수원에서 떨어진 언 배를 주어다가 가마에 쪄서 밥 대신 드려야 했던 가슴 아픈 추억은 지금도 저를 울리군 합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동네 야산에 묻어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돌아보는 나의 생활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는 어머니에게 의지하여 살아온 탓에 삶의 고달픔을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저였습니다.
이제 살기 위하여 하루 한 끼의 때 식 거리를 위하여 어머님이 살아생전에 해주셨던 옷가지와 결혼할 때 장만해주셨던 가장집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만 했고 끝내는 ‘방송원’체면을 벗어던지고 시장바닥에 나앉은 아줌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장사도 무슨 밑천이 있어야 해 먹지~하고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뜻밖의 고마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평양에서 생활하던 외삼촌이 출장차 우리 집에 들렀는데, 계란빵을 30개나 가지고 들고 왔던 것입니다.
“아이에게 좀 먹이고 너도 먹으라”고 하셨는데, 빵을 보는 순간 저의 마음은 온통 장사 속으로 차 있었습니다. 계란빵이라는 게 워낙 귀한 물건이어서 장마당에 내다 팔면 한밑천 건지리란 생각이 순간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섯 살 난 아들 진이가 빵을 먹겠다고 민망하리만치 울면서 보채는 것을 겨우 달래놓고 외삼촌을 바래려 기차역으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저는 방안 한 구석에 치워 놓았던 빵 그릇을 보며 그만에야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글쎄 아들 진이가 빵 30개의 한쪽 귀퉁이들을 팥알만큼 한 크기로 모두 떼어먹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상품이라고 상품성이 보장되어야 팔 수 있는 것인데 한개도 빼지 않고 모두 흠집을 냈으니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모두 손상된 것이었습니다.
빵 한 개를 팔면 죽이라도 한 그릇 살 수가 있어서 “빵 열 개하면 죽 열 그릇” 하고 속 궁량을 하고 있었는데 나의 장사 속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문자 그대로 머리가 확 돌아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저는 방구석에 놓여있던 빗자루를 들고 어린 진이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리고 또 때렸습니다. “왜 엄마 속을 그리도 알지 못해?! 차라리 먹으려면 옹근 한 개를 먹을 것이지 한 귀퉁이씩 잘라먹으면 엄마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게냐?!”
그렇게 말귀도 채 알아듣지 못하는 다섯 살 잡이 아들을 힘자라는껏 두들겨 패던 저는 그만에야 지쳐 쓰려졌고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빵을 먹고 싶었으면 그리고 얼마나 엄마의 눈치가 보였으면 먹은 티를 안내겠다고 그런 행동을 하였을까 싶은 것이. 그날은 정말 엄마이기를 포기하고 싶었고 더 이상 살아나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었습니다.
이튿날 저는 팅팅 부어오른 얼굴로 거울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평양, 그러면서도 평범한 우리 백성들은 죽어서도 갈 수 없는 평양이 아니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자유의 땅 대한민국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먼 길을 떠나려고 하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어린 진이가 발목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엄마 나 이제부터 말 잘 듣고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 가지말아요.”하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가슴은 아프다 못해 쓰라리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린 진이에게 내 어머니처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평양이야기만을 되풀이 할 수 없었습니다.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섯 살 어린 진이를 조용히 떼어놓으며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진이야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너에게 빵 한 개 제대로 못 먹이는 못난 어미지만 반드시 너만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나도 사람이라고 외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련다.”
엄마의 힘
2002년 드디어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남들처럼 베트남이나 태국을 경유해 온 것이 아니라 악취풍기는 밀항선 바닥에 몸을 싣고 장장 18일이나 선창에 몸을 숨기고 죽기 살기로 찾아온 대한민국입니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어느 하루도 일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회사생활은 회사생활대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아르바이트를 하여 집도 장만하고 가구들도 하나 둘 들여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내 아들 진이, 추운 겨울이면 홑옷을 입고 추위에 떨고 있을 내 아들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2006년 10월, 드디어 사랑하는 아들을 대한민국 서울에서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넘어 불쑥 커버린 아들 진이를 가슴에 품던 날,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눈물을 마음껏 흘리며 “진이야, 여기가 바로 대한민국 서울이란다. 그리고 여기가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아갈 새 삶의 터전이란다”고 흐느끼며 외쳤습니다.
2012년 5월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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